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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서범준] 춘정기



햇빛이 부서지는 여름이었다. 작열하는 태양이 자택 뒤뜰로 떨어지는 태몽을 꾸었다, 

그리 말을 하셨다. 


하나 남은 온기마저 덮을 겨울이었다. 차가운 겨울 바다에서 용이 솟는 태몽을 꾸었다, 

그리 말을 하셨다.



**






또 글공부를 하지 않고 이곳에 있는 것이냐. 앳된 목소리가 들려옴에 따라 범준의 고개도 돌아갔다. 3살 터울의 형님, 여즉 키도 뭇 계집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범준에 비해 겸하는 이제 훌쩍 사내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글공부는 영 흥미가 붙지 않습니다. 이미 누군가 만들고 읊은 것을 배우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맹랑하기 짝이 없는 말을 거침없이 뱉은 범준은 비단신을 벗고 냇가에 발을 맡긴 채 다시 고개를 냇가로 돌렸다. 흐르는 물 아래로 갈 곳 없는 고기들이 연신 범준의 발을 톡톡 치곤 했다. 겸하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럴 적에 말을 잇는 것은 항상 범준의 몫이었다.


 " 형님은 절 찾으러 오셨습니까? 저를 걱정하셨습니까? 제가 어디로 사라졌을까, 사라져 오지 않을까 좋지 않은 상상이라도 하셨습니까? 그리하여 직접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 


특기이고 재주였다. 범준은 말을 가려서 하지 않는다. 생각의 채로 말을 거르지 않고 막힘이 없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들을 뱉는 것, 외관부터 그 속까지 겸하와 범준은 닮은 구석이라곤 전혀 없었다. 어느새 발로 물장구를 치며 조심성 없이 노닐던 범준은 결국 바위에 낀 이끼 덕택에 중심을 잃고 큰 물안개를 자아내며 냇가에 빠졌다. 담담하게 자리를 유지하던 겸하가 드물게 눈을 크게 뜨며 급히 냇가 가까이로 다가왔다. 아우는 물에 흠뻑 젖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범준의 나이 열 하나, 겸하의 나이 열 넷이었다.




**



사내라면 누구나 겪는 시기가 있다. 춘정기라 그리 일컫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저 한낱 어릴 때의 치기라 명명하는 사람도 있다. 간혹 그런 시기를 거치지 않고 이르게 청년이 되는 사내아이도 존재했다, 범준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지만 겸하와는 거리가 가까운 이야기였다. 


범준은 관례를 치른 후 부쩍 외출을 할 적이 잦았고 그리도 키우는 강아지마냥 겸하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던 모습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통금을 어기어 포도청의 문지방을 밟는 일은 예사였고 항시 약주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렇다하여 학문에 게을리 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군자라면 마땅히 행해야 할 활쏘기나 검무 역시 녹슬지 않도록 꾸준하게 유지하는 모습이 퍽 모순적이었다. 겸하는 아마도 아무쪼록 절제하며 학업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리 생각했을런지. 범준은 실상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한 발만 뗀다면 당장에라도 숨을 끊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저잣거리가 온통 진흙탕이 되어 발걸음을 쉬이 하기도 힘든 날이었다. 빗방울의 세기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느낀 겸하는 서책을 읽던 것을 잠시 멈추고 문을 열어 반쯤 열린 대문을 바라보며 아우가 오기를 기다렸다. 벌써 축시이거늘. 바람이 열린 문을 통해 겸하의 소매 안으로 들었지만 개의치 않고 겸하는 다시 서책으로 시선을 내릴 참이었다. 허나, 분명 멀리 보이는 비단 옷은 범준의 것이었다. 술에 진탕 취해있었다. 범준은 그럼에도 멀리서 방문을 제끼고 앉아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 하는 범준의 환고는 이미 진흙이 튀기어 더럽혀진 후였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범준이었지만 유독 형의 앞에선 넘어지거나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이 역시 범준이었다. 


" 잠자리에 들지 않고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


발음이 엉망인 범준의 말본새를 듣던 겸하가 답하지 않고 방문을 닫으려던 찰나 범준이 닫히는 방문을 붙잡고 다시금 열어제꼈다. 


" 이젠 마주보는 것조차 달갑지 않으십니까. "


" 몸이 젖었다, 들어가서 말리는 것이 좋, "


겸하의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라는 것은 사실 굉장히 희귀한 일이었다. 겸하를 안은 범준의 몸에선 과한 약주로 인한 쓴 냄새가 아니라 축축하게 젖은 비내음이 났다. 범준은 어깨를 들썩이며 산발적으로 울음을 참는 소리를 내었다. 형은 절 걱정하셨습니까, 비가 오는데제가 사라졌을까, 사라져 영영 오지 않을까, 그리하여 직접 문을 열고 기다리셨습니까. 힘들게 말은 마친 범준은 한참을 고찰한 뒤였다, 어찌하여 이리도 자신의 미몽엔 항상 피를 나눈 자신의 형이 형상화되어 홀리는 것인지, 글을 읽는 소리, 모습, 활을 쏘는 자태, 어느 하나에도 빠지지 않고 눈길이 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뺨이 붉어지는 것인지. 범준은 대체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평생 알려 들지 않을 것이다. 범준의 춘정기는 그리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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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망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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